당신은 왜 시인이기를 시인하는가
시속의 시 네 번째 이야기
장석길

성장
힘겹게
성장하였건만
성장인 탓에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다


평등과 공평
평등이 눈흘기며
공평이 웃음짓는다
언제나 기꺼이
평등한 세상을 구축해왔음에
철저한 수치와
코 묻은 영예(榮譽)를 느낀다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선택하기를 선택할 것인가
추종하기를 선택할 것인가
삶의 존폐(存廢)의 기로에 놓여있는
비겁한 자식이여


한 없는 가벼움
읽고, 쓰고
생각하기조차 힘든
한없는 가벼움을
시는 그렇듯
담아내고 있다


죽음
정신에 내재된
개인 가치의 몰락
육체에 내재된
사회적 가치와의 내통
당신은 진정
죽음으로부터 자유한가


고독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우리가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여럿 가운데 혼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고독은 행복의 산물이다


필연
세상에
우연이 없다면
우린 삶의 모든 흔적들에
귀 기울이고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에
눈 여기고
나를 향한 비방의 가치에
주목할텐데
신은 어째서
우연을 만들지 않았는가


최초의 길
최초의 길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마지막 무렵
지난 날을 회고할 때
길을 닦아가는 과정이
우리의 세월임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우리는
최초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꿈 잃어내기
심원했던 나의 꿈은
이미 나를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를 향해
나를 견인하고 있구나
잃어낼 수 있을까
떨쳐낼 수 있을까
헛되고 헛되이
내게로 떨어져간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사실
보통의 현상에 파묻힐 때
평범의 존재에 압도될 때
우리가 말을 한다는 위대한 사실을
즉자(卽自)에게 선포하라
자유의 향유자
기백에 가득찬 숭고의 목소리를


것의 것의 것
당신은 '것'이라 말하였건만
나는 '것'이 아닌 '것'임이 분명하오
'것'을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는 '것'의 관철을 지속할 것이오
그것이 것의 것의 것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인도(人道)인 것이오


것의 것
'것'을 보았을 때
감응을 느끼게 되었고
'것'을 만졌을 때
예술적 탐닉에 빠졌으며
'것'과 나누었을 때
것의 것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


것
'것'을 읽고
'것'을 느끼고
'것'을 생각하고
'것'을 쓰다
불완전 문장 위에
완전 의미를 담아내다


사회 인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 동물이었다
사회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사회를 위해 존재했다
사회적 인간이다
사회 인간이었다


인(人)
들길의 풀들도 제 집이 있거늘
나의 정신만은 몸 뉘일 곳 없음을 느낄 때
나의 모든 감각이 부서져서
집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되었음을 느낄 때
사는 게 몹시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나는 인간(人間)이기 위해
인(人)이기를 포기했단 말인가
처절하다
살아내는 것은
사는 것이 수치스럽다


코 닿을 거리
너의 숨과
너의 호흡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 사이의 거리
0mm


너를 나로
너를 나로
가득 채우고싶다
네 생각과 기억을
네 마음과 정신을
나의 생각과 기억으로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조그만 틈조차 허용치 않는
치밀한 사랑으로
나를 너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내게 와주어
사랑할 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은 날개 달고
훨훨 날아가버린다
네 과거가
널 놓쳐주었기에
샛별과 같은 사랑으로
훨훨 날아와 주었기에
이제는 그 날개를
떼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