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별 분류

장석길

김현우

장석길 ('나' 외 16편)


나

장석길

열심히
멀어지는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

아득히
멀어지는 중이다
“나는 왜 누구인가?”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중이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누구인가?”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지금도 나는 나로부터 멀어져간다

육감
(六感)

장석길

‘그것’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다면


마음으로 느껴라


본질은 감동으로 다가오니깐

사과

장석길

내 안에
사과가 있다


색상(10)·채도(100)·명도(100)의
새빨갛고


구(
球)에 가깝게
둥그스름한


그러나 이것은
내 의식 속에 존재할 뿐


실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왔던 길이 있으면 가는 길도 있을 테니

실재 속 실제

장석길

명륜당 문묘아래
가장 그러한
느티나무 한 그루


저 아름다움은
실재(
實在)인가
혹은
실제(
實際)인가

아,
저것은
실재 속 실제가 아닌가

시를 짓다

장석길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논리의 골조를, 아니
다시 더 깊이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상식의 외장을, 아니
다시 더욱 더 깊이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이성의 내장을, 아니
다시 아득히 깊이
현상의 기초를 세운다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사람을
위한 집

장석길

좁디 좁은 집이 좋다
우풍이 새는 집이 좋다
비가 새는 집이 좋다


단열이 잘 안 되도 좋다
방음이 잘 안 되도 좋다


불완전해서 좋으니깐
불완전해서 아름다우니깐


그곳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잔상

장석길

뛰는 가슴과
깊은 고뇌로


오래 전부터
아득히


인간은
본질을 좇는다


그것은 아마
본 사람 없지만

보지 못한 이 없는


자신 안에
희미하게나마 비쳐진


본질의 잔상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까

본질과의 거리

장석길

내비 둬라
밝히지 마라
그냥 둬라


그것과의 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논리의 밝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름

장석길

언어는
존재를 밝힌다


이름에는
그것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나 또한 그렇다
나의 이름 또한 그러하다


가장 어리석었던
지난날 동안


내게 주어진
이름대로


내 삶에 부여된
바램대로


나는

살아 온 것일까

홀연의
삶

장석길

홀연히
살고 싶다


거스르지 않으며
순응하면서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에


의미를 두면서
그저 홀연하게

어머니

장석길

마음껏
목 놓아 부르기도
아까운 그 이름


닳을까봐
해질까봐
그 이름이 귀중해서


오늘도
내 마음 한 켠에
고이 간직해둔다

예쁜
꽃

장석길

곱디고운
예쁜 꽃아
널 꺾지 말 걸


나의 모든
필사의 노력으로
널 애써 지나칠 걸


내 삶에
간절한 후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후회 속에서
난 내일도 행복을 얻는구나


곱디고운
예쁜 꽃아
아픈 사랑아

무제
(無題)

장석길

설명되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내 안에 가득 찼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부는 바람에도 살랑일 수 있게

민들레의 삶

장석길

나는 사라지는 삶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흩날리는 삶


줄기를 우뚝 세우고
바람 불기를 기다린다


나를 쪼개고 또 쪼개어
꽃바람타고 날아가리

고스란히

장석길

고스란히
내 안의 
누군가의 마음을
내려 놓는다


이제는 엉겨 붙어서
펼 수조차 없는 
나의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게

흰

장석길

흰 바탕 위의 흰 선들을
흰 배경 위의 흰 글자들을 보아라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결코 아름다운 순백의 미를

김현우 ('라 만차의 사람들' 외 18편)


라 만차의
사람들

김현우

풍차 도는 라 만차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동쪽 수평선에 붉은 해
반원을 그리며 대지를 밝히고
라 만차의 사람들은
그 대지에 척박하게 살아간다


돈 키호테가 떠난 이곳은
더 이상 무적의 기사 없이
각자의 척박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들은 라 만차를 닮아있다


해마저도 사색에 빠지는 밤
술에 젖은 그들을
무적의 기사가 거닌다


무적의 기사에 사람들은
침묵으로 환호하고
입꼬리로 손을 흔든다


그들은 술에 젖은 무거운 몸에 지쳐
잠에 빠져든다
그들은 척박한 라 만차에 산다

성적표로 접은
카네이션

김현우

나태한 숫자가 가득한
종이를 접어 만든 카네이션을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린다


하얀 종이의 카네이션은
부모의 가슴을 찔러내어
붉게 물들고
그렇게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린다.


하루는 목사께서 나에게 그리 말하시더라
나이 드신 분에겐
연분홍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이라고


부모의 머리가 하얗게 바랠 때
붉은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걷어내어
그렇게 달아드리는 거라고

내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

김현우

공부를 꽤나 하는 친구가 한숨을 쉰다
“난 공부를 잘 못해. 도저히 펜이 잡히질 않아.”


공부를 꽤나 못하는 친구가 한숨을 쉰다
“넌 공부를 못해. 도저히 펜을 잡지를 않네.”


그런 친구를 보는 내가 한숨을 쉰다
“너도 공부를 못해. 도저히 펜을 잡지를 않네.”

‘잔상’을 읽고

김현우

소설 ‘은교’에서 이적요는 말했다
별의 본질은 별이라고
그저 배고픈 사람들의 눈에는 쌀로
연인들에겐 아름답게 보여
그 본질이 지워진 것이라고


사실 사람들도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몰라
단지, 생각이 많아
본질이 희미해져 잔상처럼 보일뿐

서울의
별

김현우

사색의 시간
그 강렬한 해조차 기울어
현실을 비추지 못하고
현실을 보지 못해야 비로소
동주께서 헤던 욕망을 바라본다


그러나 피곤한 가로등빛
여전히 현실을 비추고
난 피곤한 욕망에
현실을 살아간다


그렇게 속아간다

병신년
(丙申年)
겨울 을왕리에서

김현우

올 한해 참
병신같이 보냈지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닥 치열하지도 않았나
싶기도 하고


고삼의 거품이 다 날아가자
난 그저 죄수생이 되었네


왠지 모를 부끄럼에
친구놈에게 면박을 주고
밤바다를 홀로 걷고


해질녘 밀물 땐 그저
거품만 밀려들어오더니
썰물 때 밤바다는
해안선마저 까마득하다


그래, 거품이 빠진 거지
더러운 뻘이 다 들어나며
나의 치부를 까마득한 해안선에
숨기고 싶은거지

내 인생의 잡음들

김현우

의자 삐걱이는 소리
내 귀에 짜증나게 박혀온다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내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외다리로 지탱하는
녀석이
나를 붙잡겠다고 애를 쓴다


요란하게 움직이던 나를
그녀석이 꼿꼿이 서
나에게 면박을 준다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기 위해

홍대 앞 걷고싶은거리

김현우

감히 말하지만
분명 문제가 있다


휘황찬란한 이 거리의
늦은 밤은
문제가 있다


한 악사 기타줄을 튕기며
심심한 노래를 부르는 이 거리에


한곳에 모아놓은 쓰레기는 산을 이루고
한 할아버지 그 쓰레기더미에서 박스를 찾아 헤멘다


그 쓰레기 더미로도 모자라
길가엔 호스트바 전단지가 뿌려져있고
사람들은 담배를 뻑뻑 펴대며


신발만 신고 신발상자는
벤치에 그대로 두고 간다


이 거리의 이름엔
문제가 있다

순수함의 부재

김현우

사람은 걷기위해
이천 번을 넘어져야 한다


그랫던 사람이
단 두 번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


그렇게
사람은 성장한다


그들에겐
위대한 영혼이 헤던
별이 보이지 않겠지

역사의
산타

김현우

역사에
트리가 나타났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아래에 자선냄비를 놓고


빨간 옷의 할아버지는
종소리를 던져댄다


산타도 돈이 있어야지


저 자선냄비 안에 돈이
묵직하게 들어차


누군가의 손에 선물을
묵직하게 들려주기를


그대의 오늘 하루 또한
헛되지 않았다고
그대의 가치의 무게를
그렇게 묵직하게 알려주기를

하얀
나라

김현우

사랑해야지
순수해야지
이 두 가지만 해야지


길을 물어물어
하얀 나라로 가려한다


하얀 들에
하얀 눈
그리고 흰 당나귀까지


나타샤는 하얀 돌에 기대어 잠이 들고
그 위로 하얀 눈꽃이 소복이 쌓여가고
흰 당나귀 등과 머리에 하얀 눈꽃을 피운다


그들은 하얀 눈을 녹이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간다


무로 돌아간 백석을
나타샤는 여전히 사랑하고
차가운 흰 돌을 껴안으며
무로 돌아간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현우

낯선 그녀의 반응에
그 방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나를 하염없이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보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잡아 드리자
눈물 한 방울을 흘리신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던 날이다.


굽은 그녀의 등은
관 속에 곧게 펴져 있고
핏줄의 죄인들은 조문객을 받고
항상 당당하던 아버지조차도 두 손을 모으고 계신다.


그녀 혼자 하얀 옷을 입고
사자조차 검은 옷으로 그녀를 밝혀준다


그렇게 그녀가 나에게 너무 매정하다
김광석 선생님의 노래가 내 귓전을 맴돈다.

겨울 밤

김현우

이상한 일이다
나의 나라에
눈을 치우지 않으려 하자
겨울밤 눈이 운치있게 내린다


한참을 서서
겨울눈을 맞으며
행복한 청년에게
감사하고
내가 사랑한 여자가 떠오른다


추운 걸 싫어하신 그녀가
이불마냥 포근하게 덮힌
함박눈을 참 좋아하셨을 터인데


겨울나무가 피운 눈꽃이 예뻐
한 가지 따서 가려다 관둔다
그녀는 여기에 없다.


오늘 밤
눈이 솔찬히 내린다.

목로주점

김현우

이연실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고 오는 길이다


듣고 싶은데 들을 재간이 없어
내 쉰 목소리에 귀를 맡기어본다


삼십촉 백열등은 없고
할로윈 등에 기대 글을 쓰고


선생께서 돈을 모아
적금을 타 낙타를 살 때
나는 모으고자 했던 돈을 털어
맥주를 산다


멋들어진 친구여
보고싶은 내 친구여
내 전 재산을 털어 술을 살 터이니......
이곳 여종업원 얼굴이 반반하니......

주마가편(走馬加鞭)

김현우

달리는 말을
너무 상처주지는 말게나


현재를 보고 휘두른 채찍질에
미래엔 상처가 덧날 것이야


가끔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꼭 껴안아주게
그리고 꼭 말해주게


도착하면
그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고
따뜻한 마구간에서
푹신한 건초더미를 깔아놓겠다고.

고백

김현우

순백색을 걸친
그녀에 취해


음탕한 식물 녀석
제 그것을 그녀에게 향하고
벌과 나비 더러운 그것의 씨앗을
온 몸에 묻히려 날아든다


더러운 근본에
추잡한 뿌리를 묻은
음탕한 식물 녀석 그것을
내 꺾어내어 그녀에게 바친다


그리고 고백한다
더 이상 추잡한 것들이
그녀를 향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순백의 옷에 묻을 가루 걱정 없이
그대가 이곳을 걷게
이곳 모든 꽃을 꺾어
꽃다발로 그대의 손에 걸어드리겠노라고

일반
상대성
이론

김현우

툭
말 한마디 던져본다
그렇게 가벼운 말 한마디를 던진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가속운동을 하면서
그 주변의 시공간을 왜곡시킨다
일반적이다


하지만 시공간의 왜곡은
아주 미세하게 일어난다
인간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목성과 같은 무거운 질량을 가진 물체여야 비로소
느껴질 수 있게


나의 가벼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일정한 가속운동을 하며

그녀의 시공간을 일그러뜨린다
나의 말이 그녀에게 닿을 때
그녀조차 느낄 수 없게 미세하게 그녀를 왜곡시킨다


그녀는 일그러진다
나의 말에 따라 일그러진다
일반적이다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

김현우

하루는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에 대해 들었다


수학자는
미분으로 코끼리를 미세하게 쪼개어 집어넣고
물리학자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문을 닫는단다


말이 쉽지
이 두 명은......


사실 방법은 다 쉬워
근데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기 위해선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선
말도 안 되는 노력이 필요해

사랑공식

김현우

하루는 수학선생이 사랑을 논하더라
수학은 사랑이라고


“수학이란 것이 어려운 것이여. 염병 어렵지. 그럼.
근데 재밌는 건, 답이 있다는 것이여.

항상 답이 존재해.
그래서 수랑은 사랑이여.
염병 계속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주면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어있는 것이여.
그러니 어려워도 걱정 말고 그냥 외워.
그것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되도 계속 외우면

언젠가는 이해가 되고
너네 것이 되어있다니깐?“


그렇게 우리를 달래더라
연륜있는 목소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는 설렘으로 떨리더라

모든 게 다 사랑이지
내 지금을 a에 하루하루를 d로 두고
그렇게 바보같이 더해가는 것이지


그리고 어느 순간, 리밋을 걸어야지
극한값은 너무너무 멋질거야
그리고 난 그 값을 사랑하고,
그 값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될 거야